날 바라바라봐

날 바라바라봐

그러니까 지효가 객관적으로 봐도 자신의 친구인 정연은 꽤 괜찮았다. 자그마한 얼굴에 잘 자리 잡은 이목구비와 적당하게 큰 키와 꽤 균형 잡힌 몸매까지. 그 덕에 그냥 아무 옷이나 걸쳐도 태가 나는 건 덤이었고. 게다가 정연은 자신의 주변에 꽤 다정한 사람으로 통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의 주변'이라는 거다. 즉, 정연의 바운더리 안의 사람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겐? 아주 그냥 냉한 사람, 무심한 사람, 무서운 사람, 뭐 그 정도로 통했다. 그런 정연이 자신의 바운더리 밖의 무언가에 다정한 경우는 단 한 가지였다. 바로 강아지. 정연에게 강아지는 바운더리 밖의 사람의 강아지든 안의 사람의 강아지든 구분 없이 사랑스러운 존재였고 귀여운 존재였다. 그래서 지효는 정연이 이해되질 않았다. 가령,


"저번에 쯔위네 강아지 너무 귀엽지 않았어?"

"쯔위?"

"왜, 구찌 있잖아."

"아... 구찌 너무 귀엽지. 엄청 순하고 주인 아닌데도 잘 따르고."

"쯔위도 예뻤어, 그치?"

"어? 모르겠는데."


분명 같이 대화도 하고 산책도 했으면서 정연의 기억은 오직 강아지뿐이라는 거랄까. 아니 그 정도의 미인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데 왜 그 미인이 눈에 안 들어온다는 거지? 지효는 정말 정연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정연의 상식 밖의 행동은 근래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본가는 수원이지만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과 돈이 아깝다며 자취를 하는 정연은 하루에 한 번 집에 전화하는 게 일과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누가 들으면 엄청난 효녀라고 이야기하겠지만, 그 실상은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나난이의 안부와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같이 있는 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정연은 새로운 취미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SNS상의 남의 강아지 덕질이었다. SNS에서 유명한 귀여운 강아지들의 영상을 찾아보고 반복해서 보고 또 보는 것이 정연의 취미이자 힐링 방법이었다. 지효는 그런 정연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러면서도 정연이 보고 있는 영상이 궁금해 슬쩍 정연의 화면을 쳐다보았다.


"어? 쿠크다."

"너 얘 알아?"

"야 그럼 쿠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너무 귀엽지?"

"쿠크 알면 임나연도 알겠네?"

"그게 누군데?"


지효는 다시 한번 정연이 상식 밖의 사람임을 자각했다. 아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지금 저 길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임나연을 알 텐데 왜 얘는 모르는 거지? 아니 심지어 임나연이 기르는 강아지 영상을 저렇게 보면서? 저 영상에 임나연이 한 번도 안 나올 리가 없는데. 지효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쿠크 주인 모르냐고 재차 물어봤다.


"영상에 가끔 나오긴 하던데. 알아야 돼?"


'알아야 돼?'란 질문에 지효는 결국 헛웃음을 뱉었다. 잘 나가는 아이돌 가수이자 연기 도전 첫 드라마가 소위 말하는 대박을 쳤고 최근 개봉한 첫 주연작 영화마저 대박을 친 임나연을 알아야 되냐니. 연예 뉴스가 심심하면 임나연으로 도배되는 이 시기에... 누가 들으면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는 저 산속 오지에서 사는 사람의 답변이나 다름없는 대답이었다, 정연의 답은. 지효는 그런 정연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기 사람한테만 예민하고 다정한, 세상에 무관심한 저 아이를 자신이 이해해야지 하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시험 기간이 막 끝난 주말, 평소 같으면 본가에 내려가 나난이와 행복한 주말을 보내고 있을 정연이었지만 시험 기간 때문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알바 시간표가 발목을 잡아 주말임에도 나난이를 보지 못하는 불행이 들이닥쳤다. 해가 막 저물 즈음 알바를 끝내고 알바 가게 근처의 공원을 찾은 정연은 부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의 벤치에 앉았다. 절대 사람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런 길이어야 강아지들도 많이 다니니까. 정연은 멍하니 앉아 지나가는 강아지들을 보며 제 나름의 힐링을 하고 있었다. 간간이 벤치 쪽으로 다가오는 강아지들에겐 말도 걸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정연의 눈에 굉장히 익숙한 강아지 하나가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어딘가 홀린 듯 그 강아지에게로 다가간 정연은 약간 거리를 두고 쪼그려 앉아 강아지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안녕?"


그런 정연의 행동을 본 강아지 주인은 '어? 얘 낯선 사람 ㅁ...'까지 말하다 말을 흐렸다. 주인도 처음 보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문다고 말하려던 내용과 달리 강아지는 천천히 정연에게로 다가가 냄새를 맡더니 정연의 손길을 굉장히 익숙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강아지 주인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반쯤 넋이 나간 채 자신의 강아지가 남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너 되게 쿠크 닮았다. 어이구, 이렇게 애교가 많아? 아, 내가 간식을 좀 가지고 왔었어야 했는데... 미안해."


낯선 자신의 강아지를 쳐다보던 강아지 주인은 '쿠크'라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들어 혹시 자신을 알아볼까 봐 바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앞에 쪼그리고선 정수리만 보여주고 있는 사람은 별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넌 이름이 뭐야?"

"이름 아는 거 아니었어요? 걔 쿠크 맞는데."

"아, 너가 진짜 쿠크구나. 만나보고 싶었는데."


대부분 자신의 강아지를 먼저 알아본 사람들이 '진짜 쿠크 맞다'라고 하면 보이는 반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라서는 자신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더불어, 자신을 알아보고 얼음이 되는 반응까지. 근데 그 당연한 반응이 저 사람에겐 없다. 자신의 강아지가 '쿠크'라고 했는데도 '아, 너가 진짜 쿠크구나.'가 다라니. 강아지 주인, 그러니까 나연은 순간적으로 자존심이 확 상했다. 아니 내 강아지를 알아보면서 왜 나를 봐주질 않는 건데? 나연은 쿠크가 애교를 부리니 거기에 정신이 팔려 그런 거겠지 하며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한참을 그렇게 정수리만 보여주며 쿠크와 놀던 사람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제는 날 알아보겠지.


"쿠크 조심해서 가. 다음에 또 보면 좋겠다."


끝까지 쿠크만 찾고 쿠크만 눈에 담는 자신 앞의 여자에 나연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결국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와, 이런 반응 처음이야. 마스크에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다고 해도 자신을 못 알아볼 사람이 없을 거라는 게, 게다가 자신의 강아지를 알면서도 자신을 본 척도 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 황당했다. 그런 나연의 반응에 그제야 정연의 시선이 서서히 나연에게로 향했다. 나연은 자신과 정확하게 마주친 두 눈을 보며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정연은 이 사람이 왜 웃지 하는 표정으로 나연을 볼 뿐이었다. 나연이 아무런 말이 없자 다시금 시선을 낮춰 쿠크를 본 정연은 쿠크에게 안녕하고 인사하며 유유히 멀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찝찝함을 간직하고 있던 나연은 결국 같은 그룹 멤버인 채영에게 와다다다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그러니까 천하의 임나연을 못 알아봤다고?"

"어. 나랑 눈 마주쳤을 때 진짜 나를 처음 본 표정이었어. 아니 집에 TV가 없어도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면 내 얼굴 정도는 알지 않나?"

"마스크하고 얼굴 반쯤 가리고 있었다며."

"근데 쿠크를 알잖아. 그럼 나도 알아야지. 내가 엄연히 얘 주인인데."


채영은 그런 나연의 편에 서서 공감해주다가 끝내 그냥 헤프닝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라 말했다. 굳이 못 알아본 사람을 기억하고 있을 이윤 없으니까. 하지만, 나연은 달랐다. 잊고 싶은데 정말 뭐같이 잘난 얼굴이 눈 감고 그리라고 해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콕 박혀버렸다, 젠장. 이목구비는 왜 그렇게 잘나서 잊기도 힘들게. 그래서 나연은 어떻게든 그 잘난 얼굴이 나를 기억하게 만들겠다는 이상한 객기에 사로잡혀서 한 번도 제대로 세워본 적 없는 계획이라는 것을 나름 치밀하게 세우기 시작했다.

 

 

 

 

 

 

 

 


나연은 스케줄이 없을 때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공원을 찾았다. 사실 다른 방법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공원을 한 바퀴고 두 바퀴고 돌아보았지만, 연예인인 자신보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습관처럼 공원을 돌다 아무 벤치에 앉아 쉬던 중 갑자기 쿠크가 꼬리를 흔들며 리드 줄이 허용하는 최대 범위까지 막 뛰어갔다. 나연은 그런 쿠크의 반응이 처음이어서 당황해 쿠크가 달려가는 방향을 바라보았고 그쪽엔 익숙한 인영이 어느새 쿠크 앞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아있었다.


"쿠크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나 기억해?"


여전히 쿠크만 바라보는 그 잘난 사람을 나연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다시금 살폈다. 여전히 잘난 이목구비며 꽤 길쭉한 기럭지까지. 나연은 저런 사람이 연예인을 해야 하는데, 라며 속으로 무심결에 생각해버렸다. 그런 나연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정연은 여전히 쿠크만 보고 있었다. 이번엔 간식까지 챙겨온 건지 주머니에서 슬쩍 간식 봉투를 꺼내 들더니 갑자기 나연을 쳐다보았다. 나연은 갑작스레 마주친 두 눈에 뭐지, 이번엔 알아보는 건가 싶었지만 곧 정연의 입에서 나온 말에 허탈한 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건조기로 말린 고구마인데 쿠크 줘도 돼요?"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자신에게는 무심한 그 태도에 나연의 마음속은 승부욕으로 불타올랐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좋을지 고민하는 사이 그 사람은 그저 쿠크가 좋아죽겠다는 듯 여전히 쿠크랑 놀고 있었다. 나연은 곧 묘책이 생각난 듯 씩 웃으며 쿠크에게만 신경을 쏟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강아지 좋아하시나 봐요."


갑작스레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강아지 주인을 슬쩍 본 정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연을 바라보았다. 나연은 세상 무해한 웃음으로 정연을 보며 말했다.


"사실 저희 강아지가 낯선 사람 되게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그쪽한테 하는 거 보고 엄청 놀랐어요."

"인별그램 봤어요. 저도 매번 그런 문구 적혀있길래 조심해서 다가갔는데 되게 순한데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알바 안할래요?"


나연의 갑작스러운 본론에 정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연은 정연이 자신의 직업은 알겠지 하는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낯선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까 스트레스를 받더라구요. 제가 항상 케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구. 그래서 저 일할 때마다 쿠크 좀 봐주실 수 있으세요? 페이는 넉넉하게 챙겨드릴게요."


사실 나연의 오랜 고민이기도 하였다. 혼자 집에 두기가 미안해 가능한 모든 스케줄은 데리고 다녔지만, 낯선 사람을 경계하고 무는 버릇이 있는 쿠크였기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많았고 그나마 자주 본 멤버들이나 스텝들이 아니면 쿠크를 만지지도 못하였다. 정연은 그런 나연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니, 대체 내가 당신을 뭘 믿고 그 알바를 해야 하는 거죠, 라고 쓰인듯한 표정에 나연은 순간 욱했다.


"진짜 저 몰라요?"

"알아야돼요?"


와, 진짜 저 어디 인터넷도 안되는 시골에서 온 건지, 아니 쿠크를 아는데 왜 나를 모르는 건데? 억울함까지 느껴지는 나연의 표정에 정연은 괜히 머쓱해져 뒷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나연은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낯간지러워서 핸드폰으로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정연에게 보여주었다. 그 화면을 보고 나서도 정연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다.


"이제 알바할래요?"

"근데 알바라는 게 제 시간도 중요한 거라. 저 학교 수업 중일 때는 어쩌시려구요?"

"그럼 시간 맞춰봐요. 저는 스케줄 자체가 고정적인 편은 아니라서 그쪽 시간이 빌 때 제가 일이 생기면 봐주는 거로."


나연의 말에 정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은 데리고 있을 때 쿠크에게 드는 비용 외의 돈은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나연은 그래도 알바인데 알바비를 안 받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하였으나 정연은 강아지랑 시간 보내는 거 자체가 페이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알겠어요. 그쪽... 아니 그러니까 계속 그쪽이라 하고 있었네. 이름이 뭐죠?"

"정연이요. 유정연."

"정연 씨 원하는 대로 해드릴게요. 그러니까 이제 연락처 좀."


순순히 연락처를 넘겨주는 정연을 보며 나연은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정연을 정의했다. 낯선 사람이라고 한참 경계하는 것 같더니 번호는 또 쉽게 준다. 어쨌든 자주 볼 구실이 생겼고 번호도 교환했으니 일차적인 목표는 이뤘다고 생각한 나연이었다.

 

 

 

 

 

 

 


계속해서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던 나연이 별안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채영은 요즈음 계속 저기압인 나연에게 슬쩍 다가가 무슨 일이냐 물었다.


"정연이 때문에."


채영은 처음 듣는 이름에 물음표를 둥둥 띄우다가 설마 그때 언니 모르던 사람이냐고 되물었다. 나연은 결국 그동안 있었던 일을 채영에게 세세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연락처 주고받고 가끔 그 사람이 쿠크 봐주기도 하면서 나름 친분을 쌓았는데 뭐가 문젠데?"

"여전히 나한텐 무관심하다는 거?"

"진짜 좋아하기라도 해?"


채영의 물음에 나연은 대답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은 건지 침묵을 지켰다. 처음엔 꽤 잘난 얼굴 때문에 시선이 갔고 자신을 몰라서 나를 알게 만들겠다는 오기 하나로 시작했는데 쿠크를 대하는 다정한 모습들이 가끔 아주 가~끔 자신에게로 향할 때 묘한 감정을 느낀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런 나연의 반응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채영이 그래서 이젠 어쩌려고 그러냐고 물었다.


"그러게. 곧 방학이라서 고향에 간대. 그럼 내가 제안한 이 알바 같지도 않은 알바도 못 할 거라고 그러던데. 아, 어쩌지?"


그랬다, 정연의 방학이 시작되면 쿠크를 핑계로 만나며 자신을 알리려던 노력이 곧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정연은 본가에서 강아지를 키우고 있으며 그 강아지가 정연의 예쁨을 독차지하던 강아지라 정연이 다른 강아지를 예뻐하는 걸 무지 질투하기에 쿠크를 못 맡는다고 정연이 먼저 말해왔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긴 스케줄이 아니면서도 일부러 쿠크를 맡기며 얼굴도장을 찍어 이제야 서로 좀 친해지나 했는데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연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는 걸 본 채영은 저러다 말 거라고 생각하며 나연에 대한 관심 자체를 거둬들였다.

 

 

 

 

 

 

 


"오랜만에 나난이 볼 생각에 들떠야 할 애가 왜 이렇게 저기압일까?"

"그러게."


정연은 본인도 자신의 상태에 의아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런 정연이 신기했던 건지 지효가 정연에게 계속 무슨 일이냐 캐물었고 정연은 진짜 별일 아니라는 듯 그동안 나연과 있었던 일들을 지효에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임나연을 실제로 봤다고? 심지어 한 번도 아니고 자주?"

"응."

"넌 친구라는 놈이 그걸 이제야 이야기해? 그래서 임나연 예뻐?"


정연의 멱살을 잡고 정연 혼자 나연을 만난 것에 분노를 표하던 지효는 자신의 질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질문을 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분명 자신이 아는 유정연의 대답은 '몰라. 난 쿠크만 보고 있었어.'랑 비슷한 결의 대답일 테니. 그런데,


"응, 예쁘더라."


정연의 입에서 너무 쉽사리 동의하는 말이 나오자 지효는 자신이 정연의 멱살을 잡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멍하니 정연을 쳐다보았다. 지효는 나연이 정연의 바운더리에 들어온 사람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역시 그건 아니었다. 그랬다면 친구인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연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해왔을 테니까. 즉, 지금 유정연이 유정연 인생 최초로 바운더리 밖의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이다. 물론 관심인지 뭔지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뭐냐, 그 예상을 한참 벗어난 대답은."

"그러게. 나 왜 이러지?"


정연은 지효도 답을 내려줄 수 없는 답답한 자신의 상태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연예인이고 자신이랑 접점이라면 우연히 만난 쿠크 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자꾸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건지. 그랬다, 정연이 심란한 이유는 쿠크가 아닌 자신이 본가로 가서 더는 가끔 쿠크를 봐주는 일을 하지 못한다고 했을 때 지었던 나연의 표정이 자꾸 아른거려서였다. 물론, 처음으로 자신의 사람 외의 사람에게 관심을 가진 정연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지만.

 

 

 

 

 

 


정연의 방학이 시작된 이후에도 나연은 습관처럼 처음 정연을 만났던 공원으로 쿠크를 산책시키러 다녔다. 스케줄을 마치고 조금 지친 몸으로 산책을 나왔던 나연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려 쿠크의 리드 줄을 놓치고 말았고 쿠크는 그때를 기다렸던 듯 나연이 잡을 수 없는 속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쿠크야!"


쿠크를 찾아 넓디넓은 공원을 열심히 돌아다니던 나연은 누군가의 앞에서 애교 부리느라 바쁜 자신의 강아지를 보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점점 가까이 다가감에도 쿠크 앞의 사람도 심지어 자신의 강아지인 쿠크도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둘만의 세상에 빠져있었다.


"주인은 어디 가구 혼자서 그렇게 뛰어다녔어? 위험하게."

"그 주인 여기 있는데요."


나연의 말에 쿠크만 보던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나연은 당연히 서울에 없을 줄 알았던 정연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자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알바하던 데서 하루만 좀 도와달라고 그래서요. 나 알바 이 근처잖아요."

"어..."

"그나저나 리드 줄은 왜 놓친 거에요? 위험하게."

"그게..."


이상하게 말이 잘 나오질 않는 나연을 정연은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기다려주었다. 그제야 지금 상황이 서서히 실감이 난 나연이 열심히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려 가며 상황을 파악했다.


"스케줄 끝나고 산책하러 나온 거라 좀 피곤했었어. 갑자기 그렇게 달려갈 줄 몰랐네."

"쿠크가 저 알아봤나 봐요. 정말 그냥 저만 보고 뛰어오던데. 쿠크 직진 본능은 누구 닮았어요?"


정연의 농담 섞인 말에 나연은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한 채 동공 지진을 일으켰지만, 정작 당사자인 쿠크는 정연의 발치에서 빨리 안아달라며 두 발로 콩콩 뛰고 있었다. 정연이 익숙하게 쿠크를 안아 들곤 근처 벤치로 나연을 이끌었다.


"요새 왜 자주 업로드 안 해줘요? 많이 바빠요?"

"어... 좀."

"쿠크 외로웠겠다."

"아무래도?"

"근데 언니도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은 거 맞죠?"


나연은 갑자기 마주하게 된 정연 때문에 머릿속이 아주 그냥 난장판이었다. 정연이 아주 간단한 덧셈 문제를 물어도 오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하필 정연의 방학 시작과 함께 스케줄이 늘었던 것도 맞고 그 덕에 피곤한 몸으로 쿠크랑 놀아주느라 더 피곤한 것도 맞는데 지금은 피곤함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연은 바쁘게 자신의 상태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고 있었다. 쟤는 알바하고 왔음에도 멀끔한 차림인데 난 지금...

답이 없는 나연을 빤히 바라보던 정연은 나연의 눈앞으로 손을 휘휘 저으며 나연의 상태를 확인했다. 사실 졍연 역시 나연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방학 때 알바 대타는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인데 혹시 알바하고 나와서 이 공원으로 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자그마한 기대, 그거 하나로 한 알바였기에 정연 역시 지금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리드 줄을 바닥에 끌면서 자기를 향해 달려오는 쿠크를 봤을 때의 놀람은 근래 느꼈던 감정 중 가장 큰 감정이었다. 나연을 보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수십 번 머릿속으로 그려봤지만 이렇게 피곤해서 멍한 나연은 그 시나리오에 없었기에 정연은 조금 걱정되었다.

나연은 그냥 생각하기를 멈추고 정연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에라 모르겠다, 그런 심정이었다. 그냥 오랜만에 본 게 너무 반가워서, 마냥 좋아서, 그게 다였다. 싫으면 밀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연은 오히려 어깨를 낮춰 자신이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나연은 그런 정연의 행동에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를 띄웠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된 정연은 자신의 사람에게만 친절한 사람임을 온몸으로 보여줬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보여준 이 친절은 자신을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보아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나연이 하고 있을 때 정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본가 가 있으면서도 자꾸 걱정이 되더라구요."

"쿠크가?"

"아니, 언니가."

"..."

"나도 이런 적이 처음이라서 좀 낯설긴 한데... 그래서 더 많이 고민해봤는데 결국 결론은 하나더라구요."

"..."

"나 아무래도 언니가 좋나 봐."


고백 같지 않은 정연의 고백에 나연은 기대있던 고개를 들어 정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쿠크가 아닌 자신을 바라봐주는 그 눈에 담긴 애정을 확인한 나연은 어느새 정연의 무릎 위에서 잠든 쿠크를 슬쩍 보더니 정연의 팔에 팔짱을 끼며 정연의 품을 파고들었다.


"난, 처음부터 니가 좋았어."

 

 

 

 

 

 

 

 

 


"쿠크 손!"


오랜만에 본 거 맞는데 왜 자꾸 무시당하는 느낌인 건지 나연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해외 스케줄이 끝나고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정연의 자취방으로 온 건 자신인데 정연은 자신이 없던 일주일 동안 같이 있었던 쿠크랑 노느라 자신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다. 아니, 이러면 우리 처음 만났을 때랑 달라진 게 없잖아!


"나 안보이니?"

"잘 보이죠."

"지금 우리 얼마 만에 보는 건지는 알고?"

"일주일이요."

"근데 쿠크 재롱이 더 좋아?"


나연의 말에 정연은 씩 웃으며 나연에게 다가왔다. 갑작스레 가까워진 거리에 나연은 흠칫 놀랐지만 그걸 티 내진 않았다. 정연은 그런 나연에게 웃으며 말했다.


"쿠크 재롱이 더 좋은 게 아니라 쿠크한테 질투하는 언니가 좋아."


그 말을 끝으로 짧게 자신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대는 정연의 행동에 나연은 그냥 얼어버렸다. 그러자 정연은 다시금 다가오며 말했다.


"오늘 스케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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